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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間] 오늘과 내일, 이별과 만남, 그리고 바다와 하늘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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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로(初老)의 사내가 계단 밑 어두운 구석에 쭈그리고 앉았다. 손에는 생막걸리와 소주 한 병씩이 들려 있었다. 낡은 잠바와 구두, 그러나 단정했다. 가진 것이 넉넉하지 않으나, 행색에서 자존심을 느낄 만 했다. 막걸리를 따더니 숨도 쉬지 않고 배 안으로 부어 넣는다. 목이 마른 줄 알았다. 워낙 술을 좋아하는 줄 알았다. 막걸리 한 병이 금세 사내의 뱃속으로 이동했다. 

 

입으로 소주병을 따더니, 막걸리 뒤를 이어, 벌컥벌컥 마신다. 소주의 쓴맛이 얼굴을 일그러지게 하는 줄 알았다. 아니었다. 술이 필요했던 이유는 눈물을 가리기 위해서였다. 한평생 살아온 모든 감정을 담아낸 표정에서 눈물이 흘렀다. 소리 내지는 못하고, 꺽꺽대지도 못하고, 시뻘겋게 충혈된 눈에서, 피눈물이 흘렀다. 장소의 위치로 볼 때, 그의 사정을, 힘들게 짐작할 필요가 없었다. 아마도 물건을 대고 돈을 못 받았을 것이다. 그곳은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던 곳이었다. 

 

초로의 기준이 몇 살을 말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요즘 아이들의 외계어처럼 한문이 일상적으로 통용되던 시절에는, 초로하면 머릿속에 떠오르고 마음속에 자리 잡는 ‘형상’이 있었다. 사내는 숨도 거의 쉬지 못했다. 담배 하나를 꺼내 들고 입에 넣는다. 그리고 불을 붙인다. 담배는 사내가 피고, 한숨은 내가 토로한다. 아픔을 나눌 수 없지만 그를 위해 기도했다. 내 눈에서도 눈물이 났다.

 

# 아버지의 눈물을 한 번도 본적이 없다. 갓 스무 살이 넘어 이별했고, 대쪽같던 심성에 눈물을 보일 양반이 아니다. 보지도 못했으니, 상상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날 그 자리 그 사내에게서 아버지의 눈물을 읽었다. 어쩌면 모든 아버지의 눈물을 느꼈을지 모른다. 아버지로 산다는 것은, 남편으로 사는 것 보다, 버겁고 힘들다. 시간이 갈수록 그 무게가 목뼈를 짓누른다. 

 

아버지를 땅에 묻던 날은 정말 추웠다. 몇 십 년 만의 강추위라고 했다. 산속의 기온은 체감하기에 족히 영하 30도는 넘었다. 포크레인이 땅을 파지 못해, 선산 마을 아재들이 장작을 쌓고, 땅이 녹도록 불을 지폈었다. 문을 열고 방금이라도 돌아올 것 같은 아버지를, 다시는 만날 수 없다고 마음으로 확실하게 믿기까지, 25년이 걸렸다. 사내가 막걸리와 소주를 마실 때, 아버지가 앞에 있는 줄 착각했다. 아버지의 역할이 버거울 때마다, 아버지의 자리가 고단했을 아버지를 생각할 때마다, 초로(初老)라는 낱말이 심장을 돌며 떠다닌다.

 

# 이유 없이 울고 싶을 때가 있다. 이유 없이 울고 싶을 때가 있다고 한다. 살다 보면 그런 순간이 있지 않은가? 특별히 슬픈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억울한 속사정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까닭 없는 눈물방울이 흘러 내릴 때가 있다. 흘러내리지 못한 눈물은, 그냥 목구멍 속에서 굳어 버린다. 남자는 ‘이유’ 없이 울고 싶을 때가 없지만, 여자는 ‘이유’가 없어도 울고 싶은 것이 아니라 실제로 운다. 왜 그런지 이해를 못 하는 수컷 사람이라면 아직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 

 

이유 보다 앞서는 것은 순간이다. 세로의 ‘순간'을 가로로 뉘면, 그것이 바로 ‘사이’다. 머리로는 느낄 수 없고, 마음으로는 알 수가 없다. 느끼는 것은 마음의 역할이고, 아는 것은 머리가 할 일이다. 그것이 엉키고 성겨서 뒤죽박죽되면, 그런 순간이 찾아와 사이를 만든다. 시간과 마음이 사이로 벌어지면 의욕을 잃고, 사람과 관계가 사이로 벌어지면 미소를 잃는다. 오늘과 내일, 이별과 만남, 그리고 바다와 하늘. 그것들은 모두 서로서로 ‘사이’를 두고 살아간다.

 

# ‘사이’가 적당히 필요할 때가 있고, 그 ‘사이’를 좁혀야 할 때가 있다. 여기 테이데 국립공원에서 촬영한 산(The Mountain)이라는 동영상 한편이 있다. 엄밀하게 말하면 동영상처럼 만든 사진이다. 일정한 시간 간격으로 사진을 촬영한 후, 동영상처럼 연결하는 타임랩스(Time Lapse)라는 기법을 이용한 작품이다. 대서양에 있는 화산섬인 테네리페 중앙에 우뚝 솟아 있는 테이데 봉(El Teide)은 3,718m 스페인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스마트폰, 태블릿, 노트북으로 보면 맛이 나지 않는다. 큼직한 모니터가 연결된 PC에, 헤드폰을 착용한 상태에서 잠시만 다른 세상에 빠져 보기를 권한다. 세상에 태어나, 은하수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을 위하여, 사족 하나를 달자면. 밤하늘에 빛나는 구름처럼 이어진, 사진 속의 별자리들이 은하수다. 언제가 실제로 보게 될 날을 위해, 미리 눈에 기억 시켜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오늘 우리가 살아낸 하루와 살아갈 내일이라는 ‘사이’에, 편안한 미소 하나 슬며시 넣어보자.

The Mountain from TSO Photography on Vim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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