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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13 14:45

함박눈이 내리는 날, 마지막 기차가 떠나는 시간 즈음, 혼자서 오르는 산을 좋아한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함박눈은, 겨울이 주는 최고의 선물이다. 감사하게 받고, 고맙게 즐기고, 겸손하게 마주해야 한다. 선을 넘으면, 선물이 재앙이 된다. 적어도 겨울의 함박눈은, 계절이 주는 최고의 호사다. 눈이 오면 산을 생각하고, 산속에 들면 눈이 그리워지는 이유다. 

 

눈이 있는 겨울 산과 눈이 없는 겨울 산은, 같은 산이면서 전혀 다른 산이기도 하다. 바람이 있는 가을 산과 바람이 없는 가을 산은, 같은 산이면서 전혀 다른 산이기도 하다. 비가 있는 여름 산과 비가 없는 여름 산은, 같은 산이면서 전혀 다른 산이기도 하다. 산은 그래서 언제나 두 얼굴, 때로는 세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어떤 얼굴을 하고 있든, 따뜻하고 인자한 모습으로 기억하려면, 교만하지 않고 욕심내지 말아야 한다. 

 

그런 산과 처음 만나고 서른 두 번 해가 바뀌었다. 그 사이 계절은 백 스물 여덟 번 윤회를 했다. 나의 삶이 변한 것처럼, 산의 모습도 달라졌다. 나를 변하게 한 것은 시간이고, 산을 달라지게 한 것은 사람이다. 나와 산의 인생을, 시간과 사람이, 그렇게 바꿔놨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비록 변하지 않는 거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은 보이는 세상만을 믿는 마음 때문에 그렇다.

 

비록 함박눈을 밟을 수 없어도, 마지막 기차가 떠나는 시간 즈음, 혼자서 오르는 산은 포근하다. 그 시간, 기차를 타는 대신, 산을 오른다. 인적 끊긴 어둠 속으로, 바람이 지나고, 때로는 달빛이 머문다. 소설 속에서 처음 만났던, ‘칠흑 같은 어둠’의 정체를, 처음 가는 야간 산행에서 알았고 느꼈다. 칠흑의 어둠 속에서는 어둠은 곧 검정이라는 수식이 참이 된다. 칠흑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하면서, 모든 것을 듣게 만드는, 경이로운 능력이 있다. 

 

눈이 제구실을 못하면, 귀가 그 역할을 가져온다. 들리지 않았던 소리, 들을 수 없었던 소리, 들을 수 있어도 무시했던 소리가 그렇게 살아난다. 바람이 거기 있어 지나는 소리, 바람이 지나면서 나뭇잎을 흔드는 소리, 바람이 길섶 사이에 머무는 소리가 귀를 따라 마음으로 전해진다. 살아 있어 살아가는 동안, 평소에는 느낄 일이 거의 없던, 스스로의 숨소리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어둠과 바람과의 교감은 잠시뿐이다. 산을 오르려면 걸어야 하고, 산에서 내려오려면 걸어야 한다. 걸어야 한다는 것은, 움직여야 한다는 것, 움직인다는 것은 길을 찾아야 한다는 뜻이다. 길은 빛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헤드랜턴 스위치를 켜는 순간, 빛은 길을 만들고, 길은 빛으로 드러난다. 어둠의 깊이와 빛의 위력은, 바로 그 순간 그 경계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지난 7년은 지난하고 절망적인 어둠의 시간이었다. 증상은 있으나 이름은 없는 병을 얻었고, 통증은 있으나 방법은 없는 병에 빠졌고, 가졌던 것은 거의 잃었고 얻고 싶은 것은 전혀 갖지 못했다. 잃어버린 것이 많아질수록, 잊어야 하는 것도 많아진다. 그래도 ‘산’에 대한 마음만큼은 버릴 수가 없다. 아니 버릴 수가 없었나 보다. 산을 만나고 싶다, 산의 품에 잠시라도 들고 싶다. 산은 내게 올 수 없고, 내가 산으로 가는 길뿐이다. 

 

지난 주 7년 만에 처음으로 작정을 했다. 교만하지 않았지만, 욕심을 내어 보기로 했다. 아직은 해가 지지 않았을 때,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건강했다면 세 시간이면 다녀왔을 곳이다. 천천히 몸이 할 수 있을 만큼, 시간의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 뛸 수 있는 곳에서 걷고, 걸을 수 있었던 곳에서 기었다. 어둠 속에서 가만히 앉아 숨을 고르는 시간이 많아졌다. 반쯤 기어서 오르고 돌아오는 데 8시간이 걸렸다. 내려오니 우주에서 가장 깊은 시간 새벽 두 시가 됐다. 

 

 

그 시간 동안 만났다. 그렇게 바라던 산속의 바람을 만났다. 바람이 오고 가고 다시 돌아오는, 그것의 몸짓이 소리를 타고 온몸으로 들어온다. 헤드랜턴을 끄고 가만히 눕는다. 하늘에는 별이 없다. 하늘에는 구름이 없다. 바람이 오갈 때 마다, 편지가 하나씩 전해진다. 살아있어 살아온, 살아내서 살아있는, 시간의 기억을, 하나둘씩 전해준다. 망각 속에 담아 두었던 것, 과거의 어느 구석에 세워 두었던 것, 아직도 버리지 못했던 미련. 어둠 속에 바람은, 기억의 편지를 전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