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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6. 26. 06:59

#나의 첫 편지는 하늘에서 시작됐다. 눈동자를 타고 들어와 마음을 온통 파랗게 물들이던 파랑. 검푸른 여름 바다의 파랑이 아니고, 시퍼런 겨울 호수의 파랑도 아니다. 세상의 모든 파랑을 모으고 꼭꼭 눌러, 그리움만을 짜내서 만든 것 같은, 코발트블루의 하늘에서 시작됐다. 그런 하늘이 찾아오는 날이면 편지를 썼다. 편지를 쓰고 싶은 날이면 그런 하늘을 생각했다.

 

너에게 그렇게 첫 편지를 띄웠다. 언제나 만년필에 파란 잉크를 채웠다. 언제나 종이 대신 노트를 준비했다. 노트에 쓰인 편지는, 편지가 아니라 단편이 됐다. 단편의 수필, 단편의 소설, 단편의 시집. 편지를 쓰는 시간은 완벽하게 너를 만나는 시간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깊은 산속, 세상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 세상에서 가장 넓은 호수. 너에게 편지를 쓰는 동안, 나의 영혼은 그곳을 여행했다.

 

너에게 쓴 편지는 편지로 보낼 수가 없었다. 편지 봉투에 들어가지 않는 편지는, 종이가 아닌 물건으로 보내야 했다. 지금은 화석 같은 단어가 되어 버린 소포. 너에게 가던 편지는 그렇게 소포가 되어야 했다. 빨간 우체통이 아무리 많이 있어도 쓸모가 없었다. 소포는 우체국에서만 내 손을 떠날 수 있었으니까. 소포에는 몸무게에 따라 값을 매긴, 단아하거나 화려한 우표가 붙여졌다. 그렇게 단장을 마친 편지는 즐겁게 내 손을 떠나 네게로 갔다.


#한 달에 한번 남대문 문구점에 들러 노트를 사 모았다. 편지를 쓰기 위해, 답장을 쓰기 위해, 파란 하늘을 담아낼 노트를 마련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만년필 잉크를 사두는 일도 잊지 않았다. 잉크 색상은 스카이 블루에서 코발트블루를 오고 갔다. 스카이 블루는 너의 눈빛을 닮았고, 코발트블루는 나의 마음을 닮았다. 파르스름한 파랑에서 시작한 글씨들이, 파릇파릇한 잔디처럼 노트를 채웠었다.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불어서 쓰고, 눈이 내리면 눈이 내려서 쓰고, 비가 내리면 비가 내려서 썼다. 편지를 쓰게 만드는 것은 세상의 모든 것이었다. 편지를 쓰지 못할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굳이 이유를 찾는다면, ‘너’의 존재 자체가 이유가 됐다. 너만을 위해 너를 생각하며 너에게 쓴 편지는, 만년필이 파란색 잉크를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흘려내야 하는 충분한 이유가 됐다.

 

잉크와 종이는 아무런 향기가 없다. 만년필이 지나간 자리에, 꺾어지고 꼬부라지고 각진 선들이, 어쩌면 모르고 살았을지도 모르는 마음을, 글씨로 부활시켰다. 글씨로 부활한 마음에선 향기가 났다. 애틋함, 단아함, 아련함 그리고 그리움. 매번 다른 향기를 지닌 글씨가 마음을 담아, 노트 위 종이 위에 함박눈처럼 내려앉았다. 눈 속에서 함박웃음 지으며 뛰놀던 그 즐거움으로 너에게 그렇게 편지를 썼다.


#나의 첫 편지는 너에게 썼던 편지다. 너에게 말하고 싶을 때, 너에게 책을 읽어주고 싶을 때, 너에게 영화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을 때. 편지를 쓸 이유는 별만큼 많았다. 편지를 쓰지 못할 이유는 딱 하나뿐이었다. 너의 손을 잡고 있을 때 그때 뿐이었다. 그래도 한번은 네 손을 꼭 잡은 채로 서너 시간을 너를 앞에 두고 편지를 쓴 적이 있었다.

 

너의 오른손을 나의 왼손으로 살포시 감싸고 편지를 쓰는 동안, 너는 왼손으로 턱을 고이고 편지를 읽었다. 내 오른손에 쥐어진 만년필을 따라 고운 네 눈이 가볍게 발걸음을 옮겼다. 손으로 너의 체온을 느끼고, 귀로 너의 숨소리를 듣고, 가끔 네 눈을 보면서, 그렇게 편지를 썼었다. 우리는 그 순간 인류 역사상 최초이자 어쩌면 유일할지도 모르는, 라이브 레터라는 새로운 장르의 문학을 창조했을지도 모른다.

 

너에게 쓴 편지가 물건이 되어 돌아왔다. 몇 개의 박스에 담겨, 이삿짐 속에 섞여 있었다. 무심한 듯 바라보다, 설렘으로 열어본다. 함께한 시간, 동행한 세월. 그곳에 고스란히 너와 나의 청춘이 소복하게 쌓여 있었다. 종이가 나이를 먹고, 잉크도 나이를 먹고, 글씨도 나이를 먹었다. 먹먹함, 폭폭함, 촉촉함. 모든 것이 나이를 먹었어도, 너를 향한 마음들은 여전히 잘 보관되어 있었다. 너는 나의 즐거움, 너를 향한 즐거운 편지는 그렇게 쓰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