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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0. 17. 07:07

그때는 몰랐다. 아무것도 몰랐고, 까마득하게 몰랐다. 이렇게 길어질 줄, 그리고 이렇게 갇히게 될 줄, 결코 알 수 없었다. 의지만 있다면 병(病)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인간적인 신념은 화석이 됐고, 희망만 있다면 언젠가 그 희망이 현실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거품이 됐다. 신념은 버려지는 것이 아니고, 희망은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더라. 당해보니까, 그렇고. 살아보니까, 또 그렇다.

 

빼앗기는 것이다. 신념도 빼앗기고, 희망도 빼앗긴다. 그것을 지키는 것이 혼자서는 불가능했다는 것을, 그것들이 사라지는 순간 혼자서 알게 된다. 그것을 알게 되는 순간, ‘사람’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허술한지, ‘시간’이라는 괴물이 얼마나 무서운지, 지식이 아닌 감각으로 느끼게 된다. 시간에게 빼앗기는 것이 무엇이 될지, 그때는 알 수 없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고 지금도 모른다.

 

나를 지켜야 하는 것이 나만의 몫이라는 것을, 생각이 아닌 감각으로 깨닫게 되는 순간. 살아있던 신념은 화석으로 변하고, 샘물처럼 나오던 희망은 거품이 된다. 누군가를 위해 지켜야 했던 ‘나’의 존재가, 나만을 위해 지켜야 하는 ‘나’가 되면, 지켜온 모든 것이 허탈해지고, 지켜야 할 어떤 것들이 허무해진다. 그렇게 시간 이편에 서 있는 ‘나’와, 시간 저편에 있는 ‘신’을 마주하면, 돌아갈 수 있어도 소용은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시간이 무서운 것은,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위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 그 위에서 일어나게 될 모든 일. 모든 일이 될 어떤 일들을 그 위에서 만났고 만나게 될 텐데, 미리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이미 알았던 것도 소용이 없다. 시간 위에서의 무서움은, 다른 종류의 무서움이라는 것을, 그때는 몰랐고, 지금도 모른다. 그래서 돌아갈 수 있어도 소용은 없다.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아픈 자도 말할 수가 없다. 죽은 자의 말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고, 아픈 자의 말은 모두가 외면하는 까닭이다. 내가 내 속에 갇히고, 내가 내 속에 있는 병 안에 갇히고, 그렇게 모든 것이 보이지 않는 것들에게 갇히면, 그것은 살아있는 자의 살아있는 관이 된다. 그래서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는 말과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큰 저주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다.

 

오랜 기간 투병 중인 사람에게, ‘안 죽고 살아있었네’를 인사라고 건네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 그때는 몰랐고, 지금도 모르겠지만, 살아가면서 정녕 모르고 살아가기를 기원한다. 생각 없이 사는 것은 죄가 아니지만, 생각 없이 말하는 것은 죄가 될 수 있다. 무식한 것은 죄가 아니지만, 무식하게 행동하는 것은 죄가 될 수 있다. 몰라서 그렇게 살 테니 어쩔 수 없고, 알았다고 해도 소용없으니 어쩔 수 없다.

 

살아있어야 할 이유와 죽지 못하는 이유가 다를 때, 들숨을 쉴 때 생각과 날숨을 쉴 때의 마음이 달라진다. 어느 생각 어느 마음에 혹시라도 이끌려 가면, 살아있을 이유와 죽어야 할 이유가 같아진다. 그때가 바로 시간의 지평선에 있는 순간이고, 사건의 지평선으로 들어가는 길목이다. 사건의 지평선은 블랙홀의 경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산 자와 죽은 자를 가르는 선택의 경계에 있다. 가보지 않으면 알 수 없고, 알아도 깨닫지 못하는 곳이다.

 

누구나 그 경계 위에 서면, 최대한 비굴해져야 한다. 시간의 경계 선상에서 사건을 만드는 것은 선택이다. 비굴한 선택을 하려 노력하지 않으면 그 경계에서 다시 현실로 돌아올 수 없다. 그 한 번의 선택이 영원한 시간의 경계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을, 모든 것을 빼앗기고 모든 것을 잃어도 그것만은 간직해야 한다. 비굴하게 최대한 비굴하게 스스로에게 비굴하지 않으면, 돌아갈 수 없는 경계를 넘어야 한다.

 

그때는 몰랐고, 지금도 모른다. 돌아갈 수 있어도 소용은 없다. 모든 것을 알 수 없고, 모든 것이 소용없다 해도, 어떤 순간이라도 하나만은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 태초부터 영원까지 모든 시간과 공간에서, 내가 선택할 수 없는 것 하나가 있다는 것을, 잊지 않고 버텨내는 것이다. 오고 싶어 온 것이 아니듯이, 가고 싶다고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산 자들 중에 들어 있는 자에게는 누구나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기 때문이리라 (전도서 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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