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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9. 24. 22:20

@ 궁싯거리며 책을 이리저리 뒤적이다, 머리에 느낌표가 찍힌 지 십 분 만에, 옷을 들고 배낭을 메고 나섰다.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생각, 계획, 준비. 셋 모두 집에 버려뒀다. 백만 년에 한 번쯤은 그래야 할 때가 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준비’ 없이는 떠나지 못하는, 강박증을 넘어 중독 같은 이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

 

고비사막 한복판에서 테플론 테이프를 찾아도 가지고 있을 인간, 그것이 바로 나라는 인간의 정체다. 일어날 수 없는 상황도 생각하며 준비하는 것, 아마 태어날 때부터 어떤 존재가, 본능이라는 DNA에 코드를 심어 놓은 것이 틀림없다. 이건 다빈치 코드 보다 더욱 치밀하고 은밀하다. 

 

아무 생각 없이 준비 없이 계획 없이, 어딘가로 떠난다는 것은, 결국 나의 본능을 완벽하게 무시하는 행위다. 평소라면 가당치도 않은 일이지만, 가끔은 더없이 희열을 느끼는 일이다. 본래 절대로 하지 않을 것 같은 일탈을 감행할 때, 인간의 뇌는 엔도르핀과 옥시토신을 아낌없이 곳간에서 내어놓는 법이다.

 

@ 오래 전 그날 그때 그랬다. 가을이 시작될 무렵, 그러나 아직은 여름이라고 부를 때. 사내들은 어디선가 술 한잔을 걸치고 자리에서 일어나고, 처자들은 미녀를 꿈꾸며 피부 단장이 한창일 시간. 자정이 가까워져 올 때쯤 신발이 먼저 문을 나섰다. 카메라도 챙기지 않았다. 이것만으로도 야사에 기록될 일이다.

 

이럴 땐 가만히 있으면 발이 알아서 갈 곳을 찾아간다. 눈, 입, 손은 발이 시키는 대로 하면 그만이다. 그날 밤 나의 발은 결국 용산역으로 이끌었고, 뜬금없이 이유 없이 여수 가는 기차표를 손에 쥐게 했다. KTX나 새마을 이런 기차는 기차로 취급하지 않는다. 나에게 기차는 오직 무궁화다, 비둘기가 없어진 것은 정말 아쉽다. 

 

기차를 타는 맛이 예전 같지는 않다. 조용하고 깨끗하고 쾌적하다. 그렇다고 시끄럽고 더럽고 불쾌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추억에 잠시 젖어 들게 만들 약간의 양념이 없다는 것이 조금 아쉬울 뿐이다. 대신 그보다 더 큰 횡재를 만났다. 기차의 객차는 참 크다. 그런데 전부 비었다. 혼자 독차지하고 전세를 낸 모양새가 됐다.

 

@ 어둠 속의 철로는, 아침이 올 때까지,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이다. 밤은 그 자체가 터널인 까닭이다. 어둠과 직선은 터널의 상징이다. 밤은 어둠이고, 철로는 직선이다. 기차가 달리는 철로 위에서, 어둠은 그렇게 터널이 된다. 새벽을 열며 여명이 물안개처럼 동쪽 하늘에서 올라올 때, 기차는 비로소 터널을 빠져나간다. 

 

어둠은 공간이면서 시간이다. 이 공간 이 시간이 간절하게 그리울 때가 있다. 너무 외로울 때 그렇다. 그럴 때는 물리적으로 정말 혼자 밖에 없는 상황을 만드는 것이 도움이 된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그리고 그 공간 그 시간에 내가 하는 일은 항상 정해져 있다. ‘그’ 또는 ‘그녀’에게 편지를 쓴다. 

 

편지는 존재 방식이면서 생존의 몸짓이기도 하다. 편지지로는 부족해 항상 노트를 사용하고, 사각거리는 소리가 정겨운 만년필을 사용한다. 그렇게 쓰인 편지가 나이가 들면서 줄어들고 있다. 그렇게 쓰인 편지가 나이가 들면서 부치지 못 하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 올해도 편지를 쓰러 어둠의 터널 속으로 떠날 때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