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 그때는 몰랐고, 지금도 모른다. 돌아갈 수 있어도 소용은 없다
그때는 몰랐다. 아무것도 몰랐고, 까마득하게 몰랐다. 이렇게 길어질 줄, 그리고 이렇게 갇히게 될 줄, 결코 알 수 없었다. 의지만 있다면 병(病)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인간적인 신념은 화석이 됐고, 희망만 있다면 언젠가 그 희망이 현실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거품이 됐다. 신념은 버려지는 것이 아니고, 희망은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더라. 당해보니까, 그렇고. 살아보니까, 또 그렇다. 빼앗기는 것이다. 신념도 빼앗기고, 희망도 빼앗긴다. 그것을 지키는 것이 혼자서는 불가능했다는 것을, 그것들이 사라지는 순간 혼자서 알게 된다. 그것을 알게 되는 순간, ‘사람’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허술한지, ‘시간’이라는 괴물이 얼마나 무서운지, 지식이 아닌 감각으로 느끼게 된다. 시간에게 빼앗기는 것이 무엇이 ..
2020. 10.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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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格] 말은 말이어야 하고, 글은 글이어야 한다
말은 말이고, 글은 글이다. 말이 글이 될 수 없고, 글이 말이 될 수 없다. 말을 글처럼 사용하면, 감정이 곡해된다. 글을 말처럼 사용하면, 진심이 왜곡된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도를 넘으면 그렇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선을 건너면 그렇다. 말은 바람 같다. 살랑거리며 지나가는 바람은 그 얼굴에 미소를 짓게 한다. 요통 치는 바람은 그 얼굴에 공포를 각인한다. 사방에서 오는 바람은, 사방으로 갈 수 있다. 어느 곳에서나 오는 바람은, 어느 곳으로든 갈 수 있다. 자유롭게 오갈 수 있지만, 머물 수는 없는 것이 바람이다. 그것이 이치고, 그것이 순리다. 움직이지 않으면 더는 바람이 아니다. 움직이지 못하는 순간, 바람도 사라진다. 사라진 바람은 잊히지만 갇혀버린 바람은 흉기가 되기 쉽다...
2020. 9.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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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感] 나무처럼 살아간다는 것
이른 여름의 시작은 가장 몸이 즐거운 시간이다. 그 무렵 커다란 산 앞에 서는 것, 그 시간 깊은 계곡에 드는 것, 그즈음 숲길을 따라 걷는 것을 사랑한다. 나뭇잎의 변화는 멈추지 않는 바람이고, 시간을 타고 바람처럼 움직인다. 푸른 숲의 상쾌함은 그치지 않는 강물이고, 햇빛과 함께 강물처럼 흘러간다. 색은 생명이 없지만, 잎은 생명이 있다. 초록이 녹색이 색으로 존재하면 명사지만, 초록이 녹색이 잎 속에 살아가면 동사가 된다. 반짝이는 초록, 흔들리는 녹색, 시원한 그린, 상큼한 청록이 되어, 하늘로 땅으로 모든 곳으로 날아가고 흘러간다. 햇빛과 함께하면 반짝이고, 달빛 아래서는 흔들린다. 그 반짝임과 그 흔들림 앞에서 서면, 심장이 잠시 생각을 멈춘다. 머리로부터 오는 모든 신호를 차단하고, 머리가 ..
2019. 12.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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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旅] 밤 기차를 타고, 그리움과 함께, 밤의 터널을 지난다
@ 궁싯거리며 책을 이리저리 뒤적이다, 머리에 느낌표가 찍힌 지 십 분 만에, 옷을 들고 배낭을 메고 나섰다.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생각, 계획, 준비. 셋 모두 집에 버려뒀다. 백만 년에 한 번쯤은 그래야 할 때가 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준비’ 없이는 떠나지 못하는, 강박증을 넘어 중독 같은 이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 고비사막 한복판에서 테플론 테이프를 찾아도 가지고 있을 인간, 그것이 바로 나라는 인간의 정체다. 일어날 수 없는 상황도 생각하며 준비하는 것, 아마 태어날 때부터 어떤 존재가, 본능이라는 DNA에 코드를 심어 놓은 것이 틀림없다. 이건 다빈치 코드 보다 더욱 치밀하고 은밀하다. 아무 생각 없이 준비 없이 계획 없이, 어딘가로 떠난다는 것은, 결국 나의 본능을 완벽하게 무..
2019. 9.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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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間] 오늘과 내일, 이별과 만남, 그리고 바다와 하늘 '사이'
# 초로(初老)의 사내가 계단 밑 어두운 구석에 쭈그리고 앉았다. 손에는 생막걸리와 소주 한 병씩이 들려 있었다. 낡은 잠바와 구두, 그러나 단정했다. 가진 것이 넉넉하지 않으나, 행색에서 자존심을 느낄 만 했다. 막걸리를 따더니 숨도 쉬지 않고 배 안으로 부어 넣는다. 목이 마른 줄 알았다. 워낙 술을 좋아하는 줄 알았다. 막걸리 한 병이 금세 사내의 뱃속으로 이동했다. 입으로 소주병을 따더니, 막걸리 뒤를 이어, 벌컥벌컥 마신다. 소주의 쓴맛이 얼굴을 일그러지게 하는 줄 알았다. 아니었다. 술이 필요했던 이유는 눈물을 가리기 위해서였다. 한평생 살아온 모든 감정을 담아낸 표정에서 눈물이 흘렀다. 소리 내지는 못하고, 꺽꺽대지도 못하고, 시뻘겋게 충혈된 눈에서, 피눈물이 흘렀다. 장소의 위치로 볼 때,..
2019. 9.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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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 어둠 속을 지나는 바람은, 기억의 편지를 품고 온다
山・함박눈이 내리는 날, 마지막 기차가 떠나는 시간 즈음, 혼자서 오르는 산을 좋아한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함박눈은, 겨울이 주는 최고의 선물이다. 감사하게 받고, 고맙게 즐기고, 겸손하게 마주해야 한다. 선을 넘으면, 선물이 재앙이 된다. 적어도 겨울의 함박눈은, 계절이 주는 최고의 호사다. 눈이 오면 산을 생각하고, 산속에 들면 눈이 그리워지는 이유다. 눈이 있는 겨울 산과 눈이 없는 겨울 산은, 같은 산이면서 전혀 다른 산이기도 하다. 바람이 있는 가을 산과 바람이 없는 가을 산은, 같은 산이면서 전혀 다른 산이기도 하다. 비가 있는 여름 산과 비가 없는 여름 산은, 같은 산이면서 전혀 다른 산이기도 하다. 산은 그래서 언제나 두 얼굴, 때로는 세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어떤 얼굴을 하고..
2019. 9.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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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 병과 싸울 수는 없다. 다만, 견딜 뿐이다.
7년이라는 세월은 머리로 가늠할 수 있는 것보다 길다. 만약 짧다고 기억하고 있다면, 그 시간이 최소한 살만 했다는 뜻이다. 물리적으로 동일한 시간의 길이가, 다르게 체화되는 경우는 둘 중 하나다. 빛의 속도로 여행을 했던가, 시간의 흐름을 세포의 영역에서 경험했을 때다. 빛은 사람의 영역이 아니니 일어날 수 없는 일이고, 세포는 생명의 줄기인 만큼 누구나 겪을 수 있다. 물리적인 고통, 통증이라는 것은, 존재하지만 설명하기가 힘들다. 수많은 너의 문제가 아니라, 오직 나의 문제인 까닭이다. 물론 옆에서 지켜보고 함께 생활해야 하는 가족의 힘겨움도 결코 작지 않다. 그러나 지켜보는 것과 겪어야 하는 것은 다르다. 세포가 몇 개인지 짐작할 수 있을 만큼, 뼈마디가 몇 개인지 헤아릴 수 있을 만큼, 눈물샘이..
2019. 6.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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